김영호 장로가 만난 이승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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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작성일17-07-23 07:04본문
김영호 장로가 만난 이승만 박사
지난 7월 19일(수) 이승만 박사 52주기 추모식을 하며, 아직도 가슴 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다가온 이승만 박사를 그렸다.
김영호 장로는 어린 시절에 특별활동을 해왔다. 보이스카웃을 했던 학생 김영호는 이때부터 이승만 박사 앞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 때가 53년도 또는 54년도의 8.15광복 기념일로 기억을 한다.
이 당시에는 국민들이 군인과 마주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시대적 환경으로 아이디어를 모은 것이 군인들 보다 낫다고 보이는 ‘보이스카웃’이었다. 약 20여명의 보이스카웃 단원들 중에 학생 김영호가 함께 했던 것이다.
이때의 기억을 생각하는 김영호 장로는 이때가 가장 어린 나이에 이승만 박사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한 때로 기억을 하며, 우리가 많이 볼 수 있는 이승만 박사의 사진 중의 하나가 그 때의 사진이라면서 사무실에 전시되어있던 이승만 박사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같이 회상했다.
김영호 장로는 “오늘 7월 19일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날 이승만 박사께서 0시 53분에 소천하신 날이고 그것이 52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영호 장로는 “우리가 그 당시에 지도자를 잘 만났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복이며,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이승만 박사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영향을 주는 업적 7가지를 꼽았다”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1. 미국식 대통령제, 현재도 대한민국이 이 방식을 따른다.
2. 1953년에 한미 상호 조약을 맺어온다.
3. 70만명의 대군을 만들었다.
4. 농지개혁을 하였다.
5. 교육제도를 바꾸어 놓았다.
6. 양반제도를 폐지했다. 동시에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
7. 기독교의 발전을 외쳤다.
이 부분에서 김영호 장로는 “프란치스카 여사는 이승만 박사를 기억하며, 이 박사는 잠들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도하고 말씀을 읽곤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김 장로는 1954년부터 KBS 방송의 아나운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라 학교를 다니며 밤에가면 심부름도 해 주고 일도 배우면서 근무를 했다. 그러나 우연히 이승만 박사가 이동을 하면 자주 수행을 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54년에 인천에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 제막식을 한다고 하여 수행기자로 참석을 하기도 했다.
또 인천의 유리공장을 세우는 행사에도 수행기자로 참여를 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뉴욕의 많은 건물들에는 한국에서 만든 문경시멘트가 들어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문경시멘트 공장 설립하는 행사에도 참여를 했으며 이날은 매우 특별한 날로 기억했다.
이승만 박사는 식사를 한 후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오찬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자들과 자리를 한 김영호 장로는 이 박사와 대각선으로 눈이 마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오찬을 마친 이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김영호 장로에게로 와서 “임자 예수믿나?”하고 말씀을 하셔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기억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가 점심 식사를 하는데 ㄱ도를 하는 모습을 보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영호 장로가 기억하는 이승만 박사, 김 장로는 “이 박사님은 개인보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내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를 말씀하셨다. 오늘 52주기를 맞아 그 분을 기리며, 이인수라는 양아들을 맞아 그로 하여금 오늘날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며 기억속의 이승만 박사를 회상했다.
[이 게시물은 편집인님에 의해 2017-07-23 08:09:15 미주크리스찬타임스 소식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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